“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의 비밀(갈 2:20)

231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의 비밀(갈 2:20)

박종진 선교사(헤브론선교대학교)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고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자신의 한계 앞에 다다르면 여러 질문을 한다. 이런 질문이 드는 이유는 우리가 육체 가운데 살 때 나타나는 현상들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 해답을 찾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진정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질문들과 그에 대한 답을 성경을 통해 살펴보자.

하나님은 왜 옛사람의 죄 된 습관과 연약함을 남겨 놓으셨는가?

‘거듭났다’는 말은 회심, 영접이라고도 부른다. 회심은 마음 중심의 변화를 뜻하고 영접은 주인이 바뀌었다는 표현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회심의 순간에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는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칭의’라고 한다. ‘칭의’는 우리가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을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 것을 말하며, 하나님은 이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신다(롬3:23~28). ‘칭의’는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함께 부활한 것에 대하여 믿음으로 화합했을 때 주어지는 새 생명의 특징이다(롬 6:4). 그리고 ‘칭의’는 믿음으로 예수님과 연합되었다는 것이다. 이 진리는 죄인(존재적 죄인:죄 곧 나, 나 곧 죄)이 십자가에 함께 죽었다는 것이며, 과거에 지었던 죄책감에서 자유케 되고, 미래에 대한 영원한 죄의 심판으로부터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만큼 의로운 자의 신분을 얻었음을 확증하는 것이다.

바로 이 십자가 복음 때문에 주님의 완전한 의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 우리가 의로운 존재라고 칭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 우리의 옛사람의 죄 된 습관이 없어지면 좋겠는데 그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여전히 육체 가운데 살고 있다. 또한 우리의 옛사람의 죄 된 습관이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 있고 연약함도 함께 존재한다. 바울은 이것을 깨닫고 이렇게 고백하였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바울은 이와 같이 날마다 자기 안에서 죽어야 하는 옛사람의 죄 된 습관과 연약함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옛사람의 죄 된 습관과 연약함을 남겨두신 이유는 무엇인가? 결론부터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것은 복음을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서다. 복음이 영화롭게 되려면 총체적인 복음의 진리가 우리의 삶에 날마다 나타나야 한다. 어떻게 복음을 영화롭게 하시는지 구체적으로 몇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적 죄인임을 잊지 않고 기억하게 하신다.

(딤전 1:12~16) 디모데전서는 바울의 사역 후반에 쓴 서신이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과거에 어떤 자였는지를 고백하고 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 또, 바울은 이 글을 쓰는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본이 되게 하려 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바울은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변함없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크나큰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어떻게 이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옛사람의 죄 된 습관이 현재 자신의 삶에 나타나고 있는 것을 날마다 보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나의 옛사람의 죄 된 습관을 하나님께서 남겨 놓으심으로 인하여 나는 잊을 수 없다” 바울은 평생에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간다. 나의 옛사람의 죄 된 습관과 연약함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승리하게 하셨다고 고백한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바울 안에 옛사람의 죄 된 습관과 연약함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이러한 자신의 연약함을 통하여 복음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이 옛사람의 죄 된 습관을 남겨 놓으신 이유다.

둘째, 전적으로 무능한 자신의 실존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이기는 능력이 나에게 없음을 알게 하신다.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사 13:10)

해는 바벨론을 상징하고 어둠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바벨론의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인간의 어떤 선한 행위로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자기 열심과 최선을 다하면 다할수록 더 어둠 가운데 있을 뿐이며 이것이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의 의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최선과 열심인 나의 의(義)가 아니라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 뿐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히 지옥의 어둠 가운데 있어야 할 존재가 바로 나였는데, 그런 나를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내가 되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셨다. 그리하여 내 안에 자기 열심과 최선의 해는 이제 빛을 잃었다. 그리고 이제는 바울의 외침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외침이 들려온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어둠이 너희를 이기지 못하게 하여라”(요 12:35) 어둠을 이기기 위하여 나의 열심과 최선으로 반응하던 나는 죽었다.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빛이라고 생각하였던 나의 열심과 최선은 어둠뿐이었다. 그래서 날마다 나의 열심과 최선의 어둠을 십자가 죽음으로 넘기는 것이다.

옛사람의 죄 된 습관과 연약함을 왜 남겨 두셨는지 이제 알게 된다. 그것은 전적으로 무능한 자신의 실존을 잊지 않고 기억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이렇게 고백해야 한다. “주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나의 열심과 최선의 해는 십자가에서 처리되었습니다. 내 안에 참 빛이신 주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빛이라고 생각하였던 나의 열심과 최선의 실상은 어둠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둠 가운데 다니지 않습니다. 오늘도 빛의 자녀로 빛 가운데 행하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셋째, 심판보다 크신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신다.

“겨가 바람에 앞에 흩어짐 같겠고 폭풍 앞에 떠도는 티끌 같을 것이라”(사 17:13)

여기서 하나님은 심판이 너무나 크고 두려운 것임을 보게 하신다. 산에서 바람이 불 때 흩어지는 겨와 같이, 폭풍 앞에 떠도는 티끌같이 심판 앞에 우리가 얼마나 미약할 것인지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심판 가운데 “남은 자”를 남겨 놓으셨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본심인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겨와 같고 티끌과 같은 내가 어떻게 산에서 부는 바람과 폭풍을 피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겨가 서로 힘을 모은다고 티끌이 서로 협력한다고 산의 바람과 폭풍을 피할 수 있겠는가? 결코 피할 수 없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남은 자” 약속을 하신 것이다.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하시겠다는 의미이다.

주님께서 행하신 가장 크고 위대하신 일은 바로 십자가에서 아들을 죽이신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인간을 위한 구원의 길을 만드셨다. 죄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죄에 대한 심판을 반드시 하셔야 한다. 그런데 십자가는 이 두 가지를 다 충족시킨 사건이다. 십자가에서 죄 없으신 주님이 내가 되어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키셨다. 그래서 이것을 믿기만 하면 심판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하고 있으며 남은 자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된 십자가 사건을 통해 나타난 ‘심판을 이기는 하나님의 긍휼’ 바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옛사람의 죄 된 습관과 연약함으로 인하여 넘어지는 자신을 본다. 얼마나 자주 넘어지는가? 얼마나 많이 결단하였는가? 그런데 또 넘어지는 나를 본다. 이제 이 정도면 주님도 포기할 만하지 않은가? 그런데 주님이 말씀하신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그리고 심판을 이기신 십자가를 본다. 그곳에서 주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진다. 이제 바울의 고백이 들려온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 이것이 옛사람의 죄 된 습관을 남겨두신 이유이다.

넷째, 절대 믿음으로 살게 하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만약 연약함을 남겨두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기고만장하였을까? 여전히 자신들의 능력을 의지하여 살려고 하지 않았겠는가? 하나님께서 거듭난 당신의 자녀들에게 연약함을 남겨두신 것은 ‘신의 한 수’다.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승리할 수 없음을 깨닫고 주를 바라보고 의지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생활과 사역에 필요한 것들이 있다. 이때 이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과 계시된 목적을 성취하실 주님을 의지하여야 한다. 어떠한 방해와 불가능도 능히 이기시며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여야 한다. 이때 “하나님의 허락하심은 최선이다”라는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된다. 연약함을 남겨두신 것은 성령을 따라 절대 믿음으로 행하면 반드시 이기지만 나의 힘을 의지하고 나의 지혜를 따라가면 반드시 패배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함으로 날마다 성령님을 의지하고 성령의 소욕을 선택하는 절대 믿음의 사람으로 살게 하시기 위함이다.

나가는 말

어떤 사람들은 순회선교단에서 전하는 복음은 ‘완전 성화’를 주장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옛사람의 죄 된 습관과 연약함을 남겨 두신 이유가 오직 믿음으로 살게 하시고, 복음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것이 바울이 고백한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의 비밀이다. 이 진리를 깨달았다면 누구도 ‘완전 성화’를 주장할 수 없다. 날마다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 고백에 머무르지 말고, 이런 나를 포기치 않고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절대 믿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자로 나아가자.

시온 산에 서기까지!

댓글 달기

Please enter your comment!
Please enter your name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