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신호탄 위클리프와 롤라드파((Loll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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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오기까지/88호)

500년전인 1517년 10월 31일은 비텐베르크대학 신학부 교수였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신부가 비텐베르크대학 정문에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날로서 본격적인 종교개혁운동의 출발점이 된 날이다. 하지만 종교개혁 운동은 이때부터 시작이 아니라, 이미 여러 차례의 개혁들이 일어나 그 불길이 멈추지 않고 이어져 오고 있었다.

종교개혁의 샛별로 빛난 순교자의 길을 걸어갔던 한 사람,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년경 ~1348년)는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의 철학자이며 신학자로서 최초로 성경 영어 번역을 추진하였던 중세 종교개혁의 선구자 중에 한 사람이었다.

위클리프는 1370년대 옥스퍼드대학에서 차츰 당시로는 급진적인 종교적 견해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성찬의 빵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 교리를 부인하고,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성경이 기독교 교리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라고 했다. 또한 교황직은 성경적 정당성이 없으며, 교황을 적그리스도와 같다고 보았는데 14세기 교황권이 분열되자 교황권이 붕괴되는 전조라고 환영했다. 결국 그는 1378년 옥스퍼드대학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당시 14세기 로마 가톨릭교회는 신앙의 문제보다는 정치나 경제적인 관심사들이 우선시되었고 물질만능주의로 사치와 방탕이 절정을 이루어 부패가 만연했을 뿐만 아니라, 온갖 폭정을 일삼으며 그리스도의 겸손과 가난을 버리고, 잔인하고 가증한 생활을 추구했다.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위클리프는 신랄하게 비판 했다. 그는 당시 교회들의 수많은 종교적 의식행위와 율법적인 속박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아 자유함을 얻은 사람들의 양심이 위협과 유혹을 받았다고 했고, 로마교회의 권력남용을 공격하고 교황의 권위를 제한하려 했다. 특히 당시 큰 병폐였던 수도원제도와 수도승들의 나태와 시주행위, 그리고 종교적 진리를 왜곡하는 사실 등을 거침없이 비판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우상(형상)과 성자의 유품들을 숭배하는 것을 어리석은 것으로 비판하였으며, 면죄부 판매, 죽은 자를 위한 미사, 행진과 성지순례 등을 부정하였다. 당시 로마교회는 벌게이트역이라고 불리는 라틴어 성경만을 사용하였기에 일반인들은 성경을 읽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당시 백성들에게 직접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 주고자 영어로 성경번역 하였고, 많은 양의 영어성경이 필사되어 확산되었다. 그가 번역한 영어성경이 확산되자 로마교회 지도자들은 당황하였고 영국 국회는 법령을 정하여 번역했다는 이유로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는 1384년 죽을 때까지 저술과 설교 활동을 계속했다. 교황청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0년 후에 그의 유골을 다시 파내어 공중 앞에서 불사르고, 그 재를 근처 스위프트 강에 던져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14세기에 일어난 롤라드파(Lollard)는 중세 후반(1382) 이후 존 위클리프의 추종자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롤라드라는 이름은 ‘중얼거리는 사람’을 뜻하는 중세 네덜란드어 롤라에르트(lollaert)에서 유래했다. 롤라드파는 개인이 성경을 소지 할 수 없는 당시의 상황 앞에 성경을 외우며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을 하며 몰래 성경을 전달하는 일들을 감행했다.

1382년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코트니는 옥스퍼드의 롤라드파 사람들 몇 명에게 그들의 견해를 포기하고 로마 가톨릭 교리에 순종하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이 파는 도시민, 상인, 심지어 말단 성직자 사이에서 차츰 늘어났으며 소수의 하원의원뿐만 아니라 왕실의 몇몇 기사들도 지지를 보냈다.

1399년 헨리 4세가 즉위하자 이단에 대한 탄압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1401년 이교도 화형을 승인하는 잉글랜드 법이 최초로 통과되었고, 실제로 이 법이 통과되기 며칠 전에 윌리엄 소트레이가 화형을 당해 롤라드파의 첫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1500년경 롤라드파의 부흥이 시작되었고, 1530년 이전부터 롤라드파와 새로운 세력인 프로테스탄트가 결합하기 시작했다. 롤라드파 전통은 프로테스탄티즘의 확산을 촉진시켰고, 영국 종교개혁 때 헨리 8세의 반(反)교권주의 입법에 찬성하는 견해를 조성했다.

초기 롤라드파의 가르침은 1395년 의회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된 ’12 결론'(Twelve Conclusions)에서 가장 잘 진술되어 있다. 이 문서는 영국 교회가 ‘계모인 거대한 로마 교회’에 예속되었다는 진술로 시작해서 로마 교회의 서품식은 성경적으로 아무 근거가 없으므로 현재의 성직자들은 그리스도가 임명한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또한 성직자의 독신생활은 비정상적인 욕망을 불러일으키며, 화체라는 ‘거짓 기적’은 사람들을 우상숭배로 오도하고 포도주와 빵, 제단, 제사복 등을 신성시하는 것은 마술과 연결된다고 단언했다. 또한 어떤 인간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에 고위 성직자는 세속의 재판관과 지배자가 되어서는 안 되며, 죽은 사람을 위한 특별기도, 순례, 성상에의 봉헌을 비난했다.

그리고 고해성사는 구원에 불필요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나아가서 전쟁은 성경과 모순되며, 순결에 대한 맹세 때문에 수녀들은 낙태와 유아살해의 공포에 떨고 있고, 마지막으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미술과 공예가 쓸데없이 ‘낭비와 호기심, 허세’를 부추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2가지 교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성직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설교이고, 모든 사람은 자신들의 언어로 된 성경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롤라드파는 성경을 영어로 옮기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위와 같이 16세기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의 불길이 일어나기 이전에 이미 종교개혁운동의 불씨를 일으킬 심지처럼 자신의 삶을 아낌없이 태웠던 수많은 순교자들이 있었다. 우리는 또한 안다.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의 불길이 결코 멈추었거나 사그러든 것이 아님을. 지금도 우리 안에 진정한 개혁의 불씨가 살아서 오늘도 진리 편에 돌아서고 주를 간절히 고대하는 열망이 우리 안에 뜨겁게 타오르고 있음을. 이 땅의 거룩한 몸 된 교회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이 때 다시금 경건의 열망이 각 심령 안에 불같이 일어나 주님의 이름이 온 땅위에 높임을 받으시도록, 말씀을 생명과 같이 지키는 개혁의 증인들로 마지막 때에 빛을 발하게 하시기를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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