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회개’를 외쳤던 이성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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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오기까지/89호)

광야같은 민족적 시련과 고난의 시기에 참된 회개를 외쳤던 이성봉 목사(1900~1965)

‘한국의 무디’라 불리는 고(故)이성봉 목사는 1900년 7월 4일 평남 강동군에서 출생했다. 6세에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어머니의 엄격한 교육 아래서 자라났다. 경신 소학교 졸업 이후 경제적인 이유로 학업을 중단하게 되면서, 아무 생각 없이 믿어온 기복적 신앙이 흔들렸다. 하나님, 천당, 내세, 지옥을 부인하고 불공평한 세상을 저주하는 암울한 시기를 보내다가 1918년 이름 모를 병에 시달리게 되었고, 인생과 죽음에 대해 비로소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죽음 아래 모든 것이 다 매장을 당한다. 백만장자도 죽어버리니 허사요, 나 죽으면 땅 한 평, 수의 한 벌, 관 한 개밖에 못가지고 가는 것 아닌가?’

동시에 그는 병상에서 신앙인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게 되었다. “법률상으로 지은 죄, 도덕상으로 지은 죄, 양심상으로 지은 죄 등등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나는 죄인임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바치겠다는 헌신을 다짐하게 된다. ‘하나님, 이제야 깨달았나이다.  한 번만 살려주시면 이 몸을 주께 바치고,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전하겠나이다.’

26세가 되던 1925년 3월, 신학교에 들어가 3년간 신학을 공부한다. 이 기간에 그는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여전히 놓여 있던 죄의 문제 때문에 고민했다. 부흥회 때 ’14세에 기차를 타면서 12세라 속이고 반값만 지불했던’생각이 나서 역장에게 편지와 함께 기차요금을 4배로 보내 갚기도 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한 갈망이 있었고, 사역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에 영적인 갈급함을 느끼던 그는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삼일 동안 특별 휴가를 얻어 골방에 들어가 금식기도를 하다가 예레미야 1장을 읽던 중 주님을 깊이 만나게 된다. 그는 확신과 감사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졸업 이후 본격적인 목회의 길로 나서게 된다.

이성봉 목사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시기는 일제강점기와 남북분단, 6.25 한국전쟁을 거치는 민족적인 큰 시련과 고난의 시기였다. 정치적, 사상적 혼란,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황폐함과 경제적인 어려움 등 이러한 어둠 속에서 이성봉 목사는 철저한 회개와 예수에 대한 확고한 신앙, 성도의 삶의 변화를 촉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외쳤다. 복음의 기쁜 소식을 통해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던져 주었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길을 찾게 해주었다.

“이 시대는 세계적으로 환난이요, 국가와 사회적으로 환난이며, 가정적으로, 경제적으로 말할 수 없는 고난이요, 종교적, 정신적, 사상적으로 심한 혼란 중에 있으니 앞으로 올 큰 환난의 시초인가 보다. 큰 비가 쏟아지려고 큰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감이 있다.”

그는 이 세계가 가진 모든 문제는 인간의 죄로부터 비롯되기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복음밖에 없다고 믿었다. 개개인의 구원만이 아니라 구조적인 사회의 죄나 모순까지도 복음 외에는 해답이 없다고 믿었다.

그가 본 세상은 장차 두 가지로 갈라지는데, 하나님을 잊어버리기까지 자기만 사랑하다가 망하는 세상과, 자기를 잊어버리기까지 하나님을 사랑하여 축복을 받는 세상이 그것이다. 그가 말한 ‘하나님을 사랑하여 받는 축복’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유토피아적 지상천국, 혹은 경제적인 부유함 같은 기복적인 복을 말하지 않는다.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누리게 될 복, 동시에 인간됨의 참 가치를 실현하게 하며 범사에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금생에서의 복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이 모든 것의 척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며, 이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는 1938년부터 부흥사로 활동을 시작하여 1963년까지 순회집회를 인도했는데 한국의 전 지역과 만주, 일본, 미국을 대상으로 사역하며 특별히 그가 강조했던 것은 철저한 회개였다.

“회개는 구원의 입문이요, 기초인 것이니 복음의 대지가 회개요, 저주와 멸망을 막는 요새가 되는 것이다… 회개는 지적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이며… 정적으로 죄를 슬퍼하는 것이다… 의지적으로 죄를 고백하는 것이며… 행위적으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즉 회개는 단순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입술의 사건이 아니라 지, 정, 의를 동반한 전인적 사건이요, 반드시 행위가 수반되어야 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 목사는 회개의 행위적 열매를 강조했다. “법률적으로 지은 죄, 양심상으로 지은 죄를 다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사람과 관련된 것은 사람과 해결지어야 한다”이 회개가 인간을 예수와 연관 짓고 죄로부터 구원하는 첫 걸음임을 말했다.

또한 정신과 육체가 모두 새롭게 그리스도로 채워지는 변화를 체험해야 하고, 이를 삶 속에서 증명해야 한다며’사람과 사람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유난히 강조했다. 변화된 삶은 언제나 현재성을 가져야 하는 현재적 사건임을 상기시키며 그는 복음과 구원은 과거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의 문제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성봉 목사는 ‘기도’를 그 해답으로 제시한다.

“기도는 신자의 생명이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행위요, 마귀에 대한 전투적 생활이요, 자신에 대해서는 성결의 생활이다.” 그는 기도를 외치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수첩에는 매일 새벽 세시에 일어나 하나님의 종으로 서기 위해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애절한 기도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부흥회에서 받은 사례비를 가족의 안위를 위해 쓰지 않고 어려움에 처한 후배 목사와 교회를 위해 베풀었던 일화들이 있다. 그의 설교를 녹취한 설교전문을 보면 일제강점기 때 감옥에 들어가서 매 맞은 이야기, 전쟁 중 북한군에 붙들려 모두가 총살당할 때 겨우 살아난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는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강조하지 않고 다만 복음을 말할 뿐이었다.

한편 이 목사는 황해도 송화읍 무초교회 집회를 하던 중 경찰의 신사참배 요구를 받고 이를 수락하기도 했다. 이 목사는 이 부분에 대해 구태여 핑계를 대거나 변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은 강해 보이면서도 약하다. 나는 어떤 데에서는 강하였지만, 오십보 백보지 신앙의 참 정조도 다 지키지 못한 숨은 부끄러움이 적지 않다.”고 고백한다. 이 목사는 평생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일관했다. 연약하기 짝이 없는 죄인의 본 모습을 경험했기에 이 목사는 그럴수록 주님을 더 의지했던 것이 아닐까.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라는 슬로건은 그의 평생의 모토였다. 모친의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도 부흥성회를 인도하기로 결정한 이성봉 목사. 그는 한 평생을 주님께 사로잡혀 회개의 복음을 외치던 증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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