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초 찬란하게 빛난 선교의 새벽기지 헤른후트공동체(Herrnh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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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호/ 그날이오기까지)

종교개혁이 일어난 뒤 130년이 넘은 유럽에는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하였다. 그러한 긴장은 급기야 전쟁으로 이어졌고, ’30년전쟁’이라는 비극의 뿌리가 되었다. 30년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유럽 인구의 절반이 감소하였고 수많은 목회자가 죽임을 당했다. 종교개혁의 5대 강령인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예수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의 고백이 낡은 구호로만 남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밤이 깊고 캄캄할수록 별빛이 더하듯이 교회와 사회가 혼란스러웠던 그 틈바구니 속에서 피어난 것이 경건주의 운동이었다. 슈페너를 시작으로 경건주의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외침과 거룩한 삶에 대한 열망이 일어났다.

30년 전쟁 이후 가톨릭의 모진 박해를 피해 지금의 체코에 속한 모라비아와 보헤미아로부터 피난 온 이들이 있었다. 얀 후스를 중심으로 믿음을 지켜온 연합형제단이었다. 이들은 가톨릭과 다른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재산 몰수, 투옥, 고문, 화형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 속에서 신앙을 지키며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300여 년 동안의 핍박은 이들을 오히려 강한 그리스도의 군사로 제련해냈다.

이러한 박해 속에서 3만 6천여 가정이 보헤미아를 떠나 삭소니, 브란데버그, 폴란드, 헝가리, 네덜란드 등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이들은 늘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보헤미아에 복음의 씨를 없애지 마옵소서! 하나님을 위하여 거룩한 씨를 남겨 주십시오.”

이 기도가 응답이 되었다. 1722년 크리스찬 데이빗이란 목수가 중심이 되어 형제단을 만들게 되었고 이들은 함께 살고, 함께 죽는 믿음의 가족들이 되었다. 데이빗이 이끌던 이 형제단은 박해를 피하여 진젠도르프 백작의 영지인 독일 작센주의 헤른후트 라는 곳으로 들어와 정착하게 된다. 경건의 사람이었던 진젠도르프는 그리스도의 대한 열정으로 불붙은 자였다. 그는 늘 이렇게 고백하곤 했다. “나에게 한 가지 열정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이시다. 오직 예수님이시다.”그런 그가 모라비안 교도들을 만나 그들의 경건 생활에 큰 감동을 받았고 ‘주님의 보호’라는 의미의 헤른후트 공동체를 만들게 된다. 이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형제단은 대륙 곳곳에 교회를 개척하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 공동체를 이루어 장장 2세기에 걸쳐 세계선교본부센터의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헤른후트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삶의 원칙이 있었다. 그것은 말씀 중심의 삶이었고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이었다. 이들은 초대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오직 십자가의 그리스도만을 높이며 모든 삶의 전 영역에서 주님과의 살아있는 인격적인 교제를 생명처럼 여기고 실천했다. 진젠도르프의 지도 아래 소규모의 조직을 운영해 젊은 남녀와 청소년, 아이들을 대상으로 경건 훈련과 교육을 실시하였다. 저녁마다 성경을 암송하고 말씀에 대한 깊은 연구와 묵상, 회개를 통해 말씀대로 살아가는 실천을 위해 게을리하지 않았다.

헤른후트 공동체 생활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찬양시간과 애찬식을 겸한 공동예배생활이었다. 특히 예배와 교인들의 모임을 위해 특별하게 만들어진 건물은 예식 집례자나 설교자가 청중(교인)과 가깝게 소통하고 자리할 수 있도록 설계 된 전형적인 건물양식이었다. 이러한 공동체의 교류와 활동은 헤른후트 전체를 세워가는 세포와 같은 기본적인 것이었다.

그 중에서 헤른후트 공동체의 가장 분명한 성격은 그리스도의 군사로서의 모습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신앙세계 안에서만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밖으로 나아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영혼들을 위해 선교하기를 원했다. 무엇보다 이들의 선교완성을 위한 꿈을 꾸게 만든 것은 100년 동안 이어온 쉬지 않는 기도에 있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용하시기 위해 가장 먼저 기도의 영을 부어주셨다. 하나님은 진젠도르프로 하여금 100년 기도실을 만들게 하셨다. 그가 처음 헤른후트 공동체를 세운 뒤 그들 안에 여러 가지 반목과 갈등, 투쟁과 혼란이 일어나던 때였다. 공동체를 설립하자마자 마을에서 가까운 교회에서 모든 교도들이 함께 모여 성찬 예배를 하게 되었을 때, 성령께서 그 곳에 강력하게 임재하셨고 그들로 하여금 성령으로 하나 되게 하셨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서로를 향한 사랑 그리고 복음전파의 열정이 사람마다 불타오르며 서로의 손을 잡고 성전을 나서게 되었다.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각자가 경험한 이 역사 앞에 이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의논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고, 그때 진젠도르프의 마음 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성막에 불을 주시며 불을 꺼뜨리지 말라고 세 번이나 말씀하셨고, 그후 진젠도르프를 중심으로 한 시간도 빈 시간 없이 기도 당번을 짜서 24시간 365일 쉬지 않고 기도를 파수 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100년 기도의 시작이 되었다.
이러한 기도의 불을 받아 즉각적인 순종으로 선교활동의 불씨가 되었던 사건이 일어났다. 진젠도르프는 어떤 흑인 노예에게서 카리브 지역의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들의 상황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이것은 헤른후트 공동체가 선교에 열망을 갖는 계기가 되어 공동체의 몇몇은 카리브와 그린란드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스스로 노예가 되어 선교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서인도 제도의 선교 개척이 시작되고 농장주들은 노예들이 크리스천이 되면 일에 방해가 될까봐 이들의 선교사역을 방해하고 감옥에 가두었다. 선교사들은 노예와 같이 일하고, 밤에는 성경을 가르쳤다. 그들의 희생적인 사랑은 흑인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선교한지 17년 만에 2천 여 명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고, 1879년에 41개 지부와 78명의 선교사가 36,698명의 회심자를 얻게 되었다.

그린란드 땅에는 세 명의 개척자가 에스키모인들에게로 나아갔다. 1881년까지 19명의 순교자들이 나왔지만, 이들의 순교로 1,545명의 에스키모인들이 구원을 받았다. 아프리카 최초의 선교는 1736년 한 선교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지식과 지위가 높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고 불굴의 용기와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헤른후트에서 아프리카로 가라는 명령을 받은 지 7일 만에 네덜란드를 거쳐 아프리카 최남단으로 갔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가능하다. 하나님이 나를 선교사로 보내셨으므로 어떤 악조건 가운데서도 복음이 전파될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졌다. 목숨을 건 사역 속에 1882년 동부와 서부 지역에만 25개의 학교와 250명의 학자, 14개 지부, 11,704명의 세례교인을 얻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평범한 평신도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은 세계를 복음으로 정복한 놀라운 사역을 펼쳤다. 서인도 제도에 간 선교사는 토기장이였고, 그린랜드 개척자는 묘지 관리인이었으며, 목수였다. 그들은 정규 신학교를 나온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성경을 사랑하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는 주님의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통해서 역사하셨다.

이들은 첫 파송부터 1760년까지 30년 사이에 선교사 226명이 10개 국가에 입국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고 그 땅에서 죽기까지 선교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인 헤른후트 공동체의 선교는 200년간 선교사 3,000명을 파송하였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그들을 별과 같이 빛나게 하셨다. 이제 우리가 이 역사의 증인으로 새벽빛과 같이 세상을 밝히는 교회로 일어나야 할 때이다. 주님의 발걸음 소리가 더욱 가깝게 들려올수록 주님의 신부된 우리들의 가슴도 점점 벅차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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