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교육선교의 어머니 애니 베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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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호/ 그날이오기까지)

(Annie Baird, 1864 ~ 1916)

애니 베어드(한국명 안애리)는 1864년 9월 15일 미국 인디애나 그린스버그의 부유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청교도의 후손으로 농부요, 교사였고 어머니는 강인한 성격의 신앙인으로 찬송을 즐겨 부르는 분이셨다. 애니는 어릴 때부터 찬송가에 영감을 받아 언젠가는 그런 찬송을 하나라도 쓰는 것이 소원이었다.
애니는 여름성경학교에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선교사가 되기로 헌신한다. 웨스턴여자신학교를 다니며 여선교회 회장으로 섬기며 선교사의 꿈을 키웠다. 졸업 후 미국을 휩쓸었던 ‘학생자원운동(SVM; Student Volunteer Movement)’ 에 영향을 받았고 무디(D.L.Moody, 1837~1899, 미국 침례교 설교자이며 부흥사)를 비롯한 여러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애니 베어드는 대학시절부터 친구이자 같은 선교사의 비전을 갖고 있던 윌리엄 베어드(한국명 배위량)와 1890년 11월 18일 결혼하였다. 이듬해인 1891년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로 조선에 도착해 부산에서 첫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녀는 남편의 사역을 돕고 자녀를 양육하는 일을 하면서 한국의 청년들, 특히 여성들을 가르치고 세우기 위해 힘쓴 교육가로서 두드러진 활약을 펼쳤다.

애니 베어드는 남편과 함께 자신의 집을 ‘사랑방’ 으로 내어놓았다. 그래서 이 ‘사랑방’ 은 선교사들의 주일예배 처소로, 복음전도를 준비하는 장소로, 예배와 세례, 기독서적 번역, 서당교육 등의 모든 교육선교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장소는 훗날 지금의 초량교회의 모태가 되었고, 베어드 부부가 평양에 숭실학당을 세워 운영하는데 좋은 경험이 되었다.

남편 윌리엄 베어드는 처음부터 한국 남부에 선교기지를 세운다는 생각으로 부산선교지부를 세운 후 광범위한 순회전도여행을 다녔다. 부산에 이어 대구에도 첫 선교지부를 세우며 마산, 김해, 상주, 안동, 의성, 밀양 등 경상도를 중심으로 여러 내륙지방에 순회전도여행을 이어갔다.

남편이 순회전도여행을 떠난 당시 홀로 남겨졌던 애니는 낯선 땅에서 문화 충격을 채 이겨내기도 전 1892년 부산에서 태어났던 첫 딸 로즈를 1894년 5월 뇌척수막염으로 잃게 되는 아픔을 겪는다. 아이를 잃은 지 나흘 뒤에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는 “…5월 13일 주일날, 아이가 보통 잠자리에 들던 그 시간에 짧은 생애가 끝났습니다. 어머니가 짜주신 조그만 흰옷을 입히고, 새 신발을 신겼습니다… 무덤을 넘어서는 소망을 갖지 못한다면, 어떻게 이런 어려운 순간들을 살아나갈 수 있을까요… 주신 이도 하나님이요 데려가신 이도 하나님이며, 이제 아기의 영혼은 영화롭게 되어 주와 함께 있으니 감사합니다.” 라고 고백한다.

그녀는 이러한 비통한 심정과 외로움을 이기며 선교여행을 떠난 남편의 안전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찬송시 두 개를 썼다. 이것이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국교회 애창곡으로 널리 불려온 찬송가 375장 ‘나는 갈길 모르니’ 와 387장 ‘멀리 멀리 갔더니’ 이다.

“예수 인도하소서. 어둡고 길 모르니 나를 인도하소서. 어디 가야 좋을지 나를 인도하소서. 나를 도와주소서. 아이같이 어리고 힘도 없고 약하니 나를 도와주소서. 힘도 없고 약하니 나를 도와주소서.” <찬송가 375장 ‘나는 갈길 모르니’>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도 외로워 정처 없이 다니니, 예수 예수 내 주여 지금 내게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다니다가 쉴 때에 쓸쓸한 곳 만나도 홀로 있게 마시고 주여 보호하소서.” <찬송가 387장 ‘멀리 멀리 갔더니’>

단순하면서도 깊은 내면의 울림이 있는 이런 가사는 당시 전쟁과 가난으로 비슷한 처지에 있던 수많은 한국인의 영혼을 울렸다.

이 외에도 애니는 한국어 운문체를 잘 구사한 시적 감각으로 찬송가들을 번역하여 조선 성도들이 부를 수 있도록 공헌한 일과 함께 여성사업, 문서사업, 교육사업 등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남편 베어드가 세운 숭실학당과 숭실대학에서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평양숭의여학당을 세우고 평양여자성경학교에서 가르쳤다. 평양의 남녀 학생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모두 그녀를 ‘어머니’로 부르며 존경했다.

그녀는 남편의 전도사업과 교육 사업을 도우면서 교과서 번역 사업에도 누구보다 선구적으로 활동했다. 숭실학당에서는 매주 식물학을 강의하기 시작하여, 천문학, 화학, 물리학, 지리학을 가르쳤다. 다양한 자연과학 과목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소개했다. 강의와 함께 교실에서 사용할 과학 교과서들과 교습서도 여러 권 저술했다. 또한 조선인들의 신앙이야기와 회심에 대한 이야기 등 우리나라를 배경으로한 선교적 문학작품들을 저술하여 선교본부로부터 큰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한국을 사랑했던 애니는 오랜 기간 선교활동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바쁜 선교사 생활 속에서 안타깝게 1908년 암이 발병했던 것이다. 미국으로 건너가 수술을 받았으나 재발하자, 가족과 친지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아픈 몸으로 한국에 돌아와 1916년 6월 9일, 52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 곁에서 하나님 나라로 떠났다. 그녀의 이러한 선택은 죽을 때는 고향에 묻히기를 소망하는 한국인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애니의 장례식에는 그녀에 대한 애정과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온 조문객들로 넘쳐났다. 그녀가 죽기 얼마 전 마지막 일지에는 다음과 같이 썼다.
“자. 긴 싸움이 끝나고 조금 후엔 내게 날개가 달리리라. 난 다르게 되기를 원한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언제나 나에게 더 좋았다. 이제 시간이나 힘이나 능력이나 준비나 성별의 제약도 없는 곳에서 영원히 즐겁게 봉사할 것을 고대한다. 아마도 이곳보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한국인을 위해서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일하게 하실 것이다.”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승진, 곧 날개를 타고 천국으로 날아간 날, 그날이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이었다. 한국과 한국인과 한국교회를 사랑한 한 여선교사는 그렇게 지상에서 영원으로 비상했다. 그런 ‘승리한 교회’가 천국에서 지상의 ‘전투하는 교회’를 위해 여전히 기도하고 보호하기 때문에 지금의 한국교회가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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