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잊은 자 vs 은혜 아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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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삶이란 ‘은혜를 아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진다 하더라도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것 자체가 비극입니다. 자신이 가진 많은 것을 하나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는 아버지를 떠나 방황하다가 비참에 비참을 경험하고 마침 내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받고 누릴 때는 은혜를 몰랐다가 다 잃고 비참한 지경이 되어서야 은혜를 깨닫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은혜 ‘하나’만을 얻은 셈입니다.

하지만 ‘은혜’ 하나 얻었다는 것은 사실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인생을 모두 탕진하고 그 어떤 대가를 지불했다 하더라도, 십자가 복음을 만나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다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탕자가 돌아온 것이 전혀 기쁘지 않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탕자의 형입니다. 그는 돌아온 동생을 기쁘게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태도에 화를 냅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눅 15:29)

탕자의 형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다 제 것으로 허락받고 그 은혜 안에 있었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누리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졌으면서도 감격도, 기쁨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를 모르고 아버지의 집에 거했던 탕자의 형보다는, 깨지고 돌아왔지만 그 모든 실패가 보상이 될 수 있는 은혜를 깨달은 탕자의 삶이 더 복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은혜 잊은 자’의 기막힌 저주에서 건져 ‘은혜 아는 자’로 세우십니까?

거기에서 너희의 길과 스스로 더럽힌 모든 행위를 기억하고 이미 행한 모든 악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미워하리라(겔 20:43)

이 말씀은 우리가 도저히 은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도록, 하나님을 떠나 살았던 옛 자아의 더러움을 생생히 ‘기억나게’하시고 또 그것이 얼마나 구질구질하고 구역질이 나는지 스스로 ‘미워하도록’ 우리의 정서를 바꾸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많은 선지자를 보내어 그들이 행한 악이 어떤 것인지 기억하도록, 그리고 그것을 미워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오도록 이끄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끝까지 하나님을 거역하다가 결국은 망하여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갑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서에는 온갖 악독한 짓으로 하나님을 반역하고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다 왕 여호야긴이 하나님께 이해할 수 없는 은혜를 입는 장면이 나옵니다.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에윌므로닥 왕의 즉위 원년 열두째달 스물다섯째 날 그가 유다의 여호야긴 왕의 머리를 들어 주었고 감옥에서 풀어 주었더라(렘 52:31)

모든 소망이 완전히 끝나 버린 죄인 여호야긴의 삶에 정말 은혜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은혜라는 말은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인 것입니다.

에윌므로닥 왕을 통해 받을 자격 없는 여호야긴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진정한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자아와 죄의 감옥에 갇힌 우리에게 베푸실 은혜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하나님은 이 상징적인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이루신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대로 갚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실패하고 비참한 나’는 죽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나’만 남았습니다. 나는 이제 은혜 입은 자, 그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이것을 잊는 순간 끝입니다. 은혜 잊음의 병은 끔찍합니다. 주의 은혜 사슬되사 나를 주께 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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